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스마르크 추격전 (문단 편집) === 비스마르크의 최후 === ||<-3> '''{{{+1 비스마르크의 최후}}}'''[br]Last battle of the battleship Bismarck {{{-2 [[독일어]] : Letztes Gefecht des Schlachtschiffes Bismarck }}} || ||<-3>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일부 || ||<-3> [[1941년]] [[5월 26일]] ~ [[1941년]] [[5월 27일]] || ||<-3> '''장소''' || ||<-3> 북대서양 || || '''교전국''' ||<^|1>[[영국|[[파일:영국 국기.svg|width=23]] 영국]] ||<^|1>[[나치 독일|[[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나치 독일]] || || '''지휘관''' ||<^|1>{{{#!wiki style="font-size:0.90em; letter-spacing: -0.7px" {{{-2 -함대사령관}}} [[파일:영국 국기.svg|width=18]] 존 토비 {{{-2 -로드니 함장}}} [[파일:영국 국기.svg|width=18]] 프레더릭 달림플해밀턴}}} ||<^|1>{{{#!wiki style="font-size:0.90em; letter-spacing: -0.7px" {{{-2 -함대사령관}}}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18]] [[귄터 뤼첸스]]† {{{-2 -비스마르크 함장}}}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18]] [[에른스트 린데만]]† }}} || || '''병력''' ||[[아크로열급 항공모함|항공모함 1척]]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7척 ||[[비스마르크(전함)|전함 1척]] || || '''피해 규모''' ||전함 1척 손상 경순양함 1척 손상 5명 사상 ||전함 1척 침몰[* 격침인지 자침인지 논란이 있는 관계로 중립적 명칭인 침몰로 표기한다.] 2,200여 명 전사 111명 포로[* 부상 악화로 1명 사망] || ||<-3> '''결과''' || ||<-3> '''영국 해군의 승리''' [br] '''[[비스마르크(전함)|비스마르크]] 침몰''' || ||<-3> '''영향''' || ||<-3> 독일 해군의 수상함 통상파괴전 위축 || ||{{{#!wiki style="margin:-5px -10px" [youtube(9ZHF2_o52x4)]}}}|| 5월 27일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하자 전함 킹 조지 5세와 로드니, 순양함 노포크와 도셋셔가 비스마르크에 접근하였으며, 오전 8시 47분 로드니를 시작으로 비스마르크에 일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비스마르크도 곧 응사에 나서서 2차대전에서 굉장히 보기드문 전함 간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비스마르크 격침당일 영국군 첫 포탄 착수.jpg|width=100%]]}}}|| || 전함 로드니가 쏜 초탄 착탄장면. 이날 전투의 첫 포탄이다. || KGV와 로드니는 16인치와 14인치 대구경 함포를 통해 비스마르크를 공격하였으며, 중간중간 전함이 전함에 어뢰를 쏘는 좀처럼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지곤 하였다. 어쨌든 비스마르크는 함교에 명중탄을 맞아 뤼첸스 제독과 참모진이 전사하고 함장 린데만 대령이 부상당하는 와중에도[* 이후 [[부장]]이 지휘권을 인수해 버티다가, 지휘소로 쓰던 [[PX]] 구획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여러 장교들과 함께 전사했다.] 필사적으로 응전하고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앉은뱅이라 고정표적 신세가 된 상태에서 피해를 입은 함포들이 하나둘씩 침묵하고 군함의 마스트는 물론이고 군함의 거의 모든 부분이 파손되어 사실상 무력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스마르크는 격침되지 않았으며, 10시 15분이 되자 KGV와 로드니가 '''연료부족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넬슨급 로드니 비스마르크와 교전.jpg|width=100%]]}}}|| || 비스마르크와 교전중인 [[넬슨급 전함]] 로드니. [[킹 조지 5세급 전함]] 1번함 킹 조지 5세 갑판 위에서 전투 중간에 촬영. || 토비 제독은 영국이 자랑하는 전함의 포격에도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킬 수 없다는 점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다른 군함들에게 어뢰로 비스마르크를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당시 도셋셔만이 어뢰를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가까이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하였으며, 비스마르크는 좌현으로 전복되어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도셋셔는 총 3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며 이들 중 1발은 비스마르크가 침몰하고 있을 때 명중한 탓에, 상부 구조물에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이로 인해 영국은 도셋셔가 발사한 어뢰가 결정적인 타격이 되어 격침되었다고 주장하였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도셋셔에서 본 격침된 비스마르크(어뢰 명중 직후).jpg|width=100%]]}}}|| || 영국해군 순양함 도셋셔 갑판 어뢰발사관 옆에서 촬영한 이미 격침되어 선수만 물 위에 올라온 침몰 중인 비스마르크. 도셋셔는 저 직전에 비스마르크에게 어뢰를 명중시켰다. || 반면 독일군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KGV와 로드니가 연료부족으로 인해 비스마르크에서 멀어질 때 비스마르크에 살아남은 최선임자였던, 주기실장 게르하르트 유나크 [[해기사|기관]][[대위]][* 비스마르크 함의 기관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기관장은 발터 레어만 [[소령]]으로, 생존하지 못했다.]의 지시에 따라 배의 포기가 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배수 밸브를 열고 폭약을 설치해 자침시켰다는 것이었다. 이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미 비스마르크 함의 승무원들 대다수가 생존하지 못 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침몰이 거의 확정된 상황에서 급하게 자침 결정이 이뤄진 것으로 보이고, 때문에 자침설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비스마르크가 침몰하면서, 퇴함 지시에 따라 수백 명의 생존자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침몰이 확인되자 생존자들의 구조를 시작, 유나크 대위를 포함하여 승조원 110명과 수상기 정비병인 에른스트 카도브(Ernst Kadow) 공군 [[상병]] 1명 총 111명을 구조했으며, 승조원 중 1명이 구조된 직후 사망했다. 그러나 후방의 구축함으로부터 유보트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경보를 받은 토비 제독이 급히 함대를 철수시켜야만 했기에 구조 작업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이들 중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잠수함이 구조한 3명과 기상함이 구조한 2명을 제외한 생존자들이 북대서양에서 저체온증 등으로 죽었다. 인근 해역에 있던 스페인 해군 중순양함 [[카나리아스급 중순양함|카나리아스]]도 수색을 진행했으나 생존자를 구조하지는 못했고, 대신 시신만을 수습해 함상에서 장례식을 치르어 주었다. 이 시점에서 사령관 뤼첸스는 이미 전사한 후였으며 함장 린데만 대령은 함교가 피격당했을 때 중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생존자 가운데 유나크 대위에 이은 차선임자였던 4등 포술장교 부르카르트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 대위 등 몇몇은 흰색 정모를 착용한 인물이[* 당시 독일 해군에서 흰색 정모를 착용했던 건 오직 최고지휘관들 뿐이었고 뤼첸스는 저 시점에서 전사가 거의 확실시되는 관계로 이는 린데만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배가 뒤집히기 직전에 부상당한 몸으로 밖에 나와 승조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사람은 아니지만, 비스마르크의 마스코트이자 [[함재묘]]인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구축함 HMS 코사크(Cossack)[* [[알트마르크 나포 사건]] 당시 알트마르크를 나포한 그 배 맞다.] 함에 구조되었고, 이후 '[[오스카(고양이)#s-2|오스카]]'(Oskar, Unsinkable Sam)라는 이름이 붙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비스마르크 전사자 장례식(스페인 중순양함 카나리아스).jpg|width=100%]]}}}|| || 스페인 해군 [[중순양함]] [[카나리아스급 중순양함]] 1번함 카나리아스 함의 갑판 위에서 거행되는 비스마르크 전몰 장병들의 장례식[* 생존자 구조는 실패했지만 대신 시신만을 수습해 장례식을 치렀다. 스페인 함이었던 관계로 저기에 독일 수병은 한명도 없고, 전원 스페인 해군 수병들이다.] || 며칠 뒤인 6월 1일, 단독 행동에 나섰던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함이 브레스트 항에 무사히 입항하며 라인 연습 작전은 종료됐다. 무선 봉쇄로 비스마르크의 격침 사실을 모르고 있던 브링크만 대령과 승조원들은 먼저 온 비스마르크가 자신들을 맞이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가, 입항 후 비스마르크가 격침됐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